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화가 지망생 히틀러 == ||<-2> 히틀러의 그림들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itler_Watercolor_-_Munich_Royal_Hofbräuhaus.jpg|width=100%]] [[파일:HofbräuhausamPlatzl.jpg|width=100%]]}}}|| ||<-2> 뮌헨 로얄 호프브뢰하우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dolf_Hitler_-_Die_Karlskirche_im_Winter_(1912).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newsimg.bbc.co.uk/_39818113_watercolour_story_ap.jpg|width=100%]]}}}|| || 겨울의 칼스키르헤 교회 || 빈 카를 성당 || 1905년, 열 여섯의 나이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무작정 올라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인지 갑작스러운 상경에도 다른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갓 서울로 온 시골뜨기에게 웅장한 건물들과 예술의 향기로 가득찼던 빈은 신세계였고, 히틀러는 예술가를 꿈꾸며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낙방하였다. [[재수(입시)|재수]]까지 하였지만 이듬해에도 떨어졌다. 직접 교장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자, 공교롭게도 [[유태인]]이었던 교장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보다도 건축에 가깝네. 건축 학교로 가는 게 어떤가?"'''라며 건축을 권유했고 히틀러는 굉장한 모욕을 느꼈다고 후일 저서에 회고했다. 이러한 화가 히틀러의 행적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매우 유명한 일화로, 미디어에서도 자주 묘사된다.[* 인터넷에서도 [[밈(인터넷 용어)|밈]]으로 다뤄진다. 대충 미대 떨어진 [[여자]] vs [[남자]]에서 여자는 울고 있고, 남자는 '''총통이 된다'''. [[https://fmkorea.com/5301454536|#]]] 다만 이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히틀러 본인이 그렇게 느낀 것 뿐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입시는 지정된 상징적·[[성경]]적 장면들 중 두가지를 그리는 실기시험과 포트폴리오 심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히틀러의 작품은 인물이 적다(few heads)는 점을 지적받아 통과되지 못했다고 한다.[[https://www.news18.com/blogs/world/koral-dasgupta/beyond-time-an-unfortunate-artist-called-adolf-hitler-14361-1050989.html|#]] 사실 위 그림을 보면 알듯이 히틀러가 [[원근법]] 실수가 조금 있지만[*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몇몇 작품을 보면 소실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구도가 삐뚤어져 있다. 다만 입시생 수준에선 있을 법한 정도의 실수다.] 일반인과 비교하면 그림을 상당히 잘 그리는 편이었다.[* 다만 위 작품을 포함해 현재 전해지는 히틀러의 그림들은 대부분 입시생 시절이 아니라 그림 엽서 화가 시절이나 그 이후에 취미로 그린 작품들이다.] 하지만 자신있는 건축물 그림과는 달리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인물과 배경을 조화시키는 것에는 미숙했는데, 학교측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평가했기에 불합격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 예술의 기조는 [[초현실주의]]였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아무런 상상력이나 느낌도 없이 기계적으로 건축물을 그린 히틀러의 그림에 매력을 느끼진 못 했을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터 겸 작가였던 존 건서는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들을 보고 "그냥 건축가의 스케치다. 고통스럽고 정밀한 제도기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가 순수미술에선 가망이 없으니 건축학교로 가라는 판정을 받은건 당연하다"고 반응했으며, 후대에 발매된 "히틀러의 수채화"라는 화집에서는 '재미없고 하찮은 도시 풍경화만 그리는 싸구려 프로 화가'라고 평가했다. 기술은 있으나 미술적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못 그린다고 깠다기보단, 오히려 적성을 살릴 것이라고 권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것을 도저히 이룰 수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건축 학교에 입학하려면 먼저 실업 학교를 졸업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실업 학교를 중등 과정만 마치고 중퇴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다. 또한 다른 교육들이라도 대신 받으려고 해도 능력이 안 되었던 나머지 받을 수가 없어 좌절하고 만다. 특히 건축학과는 예나 지금이나 [[수학(교과)|수학]]을 잘 해야 되는데, 히틀러는 수학 성적은 낙제였고, 본인도 수학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증오하던 터라 당연히 수학이 중시되는 건축학을 이수할 수 없었다. 결국 히틀러는 학업을 완전히 접어야 했고, 이런 좌절은 히틀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중졸로 사회에 나오게 된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면서 어떠한 목표 없이 백수짓을 전전했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나 연합군의 비아냥에서 언급한 것처럼 빈 유학 생활 동안 페인트집에서 일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자서전 '나의 투쟁'의 내용과는 달리, 빈에서 살던 백수 시절에도 처음부터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지는 않았다. 세무서장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과 [[독신]]이라 남편도 자식도 전혀 없는 [[고모]]들이 물려준 재산을 쓰고 다녔다. 또한 어머니도 생전에 히틀러한테 용돈을 두둑하게 주었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그가 부업 삼아서 그리던 그림 엽서가 잘 팔리면서 금전적으로는 별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주기적으로 남편과 자식이 없는 고모나 외가 쪽 [[이모]]들에게 [[피아노]]를 산다거나 레슨을 받는다거나 그림 도구를 산다는 명목으로 나중에 물려줄 유산도 [[가불#s-1|가불]]해서 썼을 뿐더러 이런 용돈들로 옷을 사고 바그너의 오페라 등을 보러 다니며, 연주회와 전시회에 다니면서 할 일 없이 놀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은 상당히 많았고, [[연금]]과 유산 상속 등으로 받은 재산을 '아껴만 쓴다면' 얼마든지 일을 안 하고도 충분히 일상생활은 가능했다. 히틀러가 독신자 숙소를 전전하며 삶을 이어갔던 세월은 고작 1~2년에 불과 했고, 빈 시절 초기 그가 받은 한달 연금은 당시 '''초임 배석판사의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연금을 여러 개 수령해서 여동생 파울라한테 수령을 양보할 정도였다니 그의 물려 받은 재력이 상상이 간다. 하지만 히틀러 본인에게는 경제관념 따위는 없었고, 배석판사만큼 받는 돈으로도 부족해서 고모나 어머니에게 다시 손벌리기 일쑤였다. '먹고 사는 문제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집권 후에도 경제에 대해 무식했던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경제 같은 건 의지에 달렸다'고 하거나 아예 경제 전문가들한테 맡겼다. 다만 의사 에두아르트 블로흐가 히틀러의 가정이 가난해서 치료비를 받지 않고 나중에 집권한 뒤 보답받았음을 생각하면 마냥 부유했다거나 가난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빈에서의 실패 이후에도 미술가를 계속 꿈꾼 히틀러는 심약한 어머니를 설득해 [[파리(프랑스)|파리]]로 간다.[* 그리고 얼마 못 가 그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사망한다.] 하지만 [[야수파]],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혁신적인 화풍들이 인기를 끌던 당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딱딱한 화풍과 건축물 그림만을 너무 선호한 나머지 그저 그런 미술학도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그림 실력은 정말 '미술가 지망생' 수준이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정치가로 출세한 후에 예전의 그 그림들이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자, 스스로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았는지 그런 그림들은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들 대부분도 건축물에 대한 단순한 모사(模寫)화이다. 여하튼 꿈에 그리던 [[화가]]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건축대에도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한동안 빈에서 그림엽서 등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본인은 매우 불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수개월에서 1년 사이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먹고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빈에서 시작한 그림엽서 '화가' 인생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1년 전부터는 장사가 더 잘 되는 [[뮌헨]]으로 옮겨서 전쟁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뮌헨에서 히틀러는 상업광고에까지도 손을 대서 찌라시용[* [[찌라시]]라고는 하지만, 아직 다양한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러한 상업미술가도 상당히 유망 직종이었다. 특히 극장용 간판은 1980년대까지도 제법 벌이가 되었다.] 그림들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그림들이 그리긴 더 쉽고 벌이도 그림엽서보다 훨씬 좋은 데다가 평도 나쁘지 않아서 전쟁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이쪽으로 쭈욱 눌러 앉았을 수도 있었다. 흔히 현대 들어, 히틀러의 화가 지망생 시절을 이야기할 때 예술대학에 낙방한 것을 가지고 '무명의 창작자'나 '안 팔리는 비운의 예술가' 같은 이야기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위 일화에서 보듯이 '''히틀러는 그림으로 꽤 돈을 많이 벌었다'''. 단지 히틀러 자신이 도전한 등용문 자체가 너무 험난한 높은 벽이었는데다 히틀러 본인이 소위 '[[입시미술]]'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제대로 학업에 도전할 끈기가 없었기 때문에 번번히 탈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일반인 수준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예술로는 꽤 잘 나갔다. 현대로 따지면 유명 미대에는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개인 커미션도 받고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프로젝트 외주도 조금씩 받으면서 상업예술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는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대 입시에 낙방했다는 점과 히틀러의 라이벌들이 예술 취미에서 히틀러보다 더 나은 수준을 보여준 점[* [[윈스턴 처칠]]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에게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문학으로 20대 초반에 등단하면서 쓴 시가 얼마 뒤(당연히 정치 활동 이전 시절이므로 권력이 아닌 문학적 재능으로)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건 예술가로서 '비엔나 아카데미'라는 상당한 수준의 학교를 가고 싶어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대중적으로는 꽤 '팔리는 창작가'였다. 심도있는 예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단순 그림엽서와 간판 그림만으로 웬만한 은행원 수준의 수익을 얻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꽤 짭짤하게 벌었던 것으로 보아, 그 한계가 명확했던 것일 뿐 예술적 재능은 확실히 일반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별다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림의 [[모작]]조차도 못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학원에서 돈 주고 미술을 배운다 쳐도 재능이 평범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는 히틀러 정도의 '그림으로 돈을 벌어 먹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능이 있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위의 카를 성당 그림 수준으로 그리려면 어느 정도 그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 지도로 주 2~3회 배워 2-3년은 걸려야 해낼 수 있을 정도이다. 99% 이상을 차지하는 미술 재능 없는 보통 사람은 피카소가 10년을 가르쳐도 영원히 저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만약 1차 세계 대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는 역사에 이름 남을 유명한 예술가까지는 못 되었더라도, 적당히 그림 그려가며 돈 벌어 먹고사는 상업 화가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엉뚱하게도 최근 국내 및 해외에서 이와 관련해 '''미대 입시 탈락을 비관해 자살한 어느 독일인(Hitler killed himself because he was rejected from art schools)'''이라는 드립이 간간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